윤미네 집

나무와 숲이 아름다운 유월이면, 우리집 큰애 윤미가 시집간지 2년이 된다. 지난 해(1989년), 스물여섯이 된 윤미는 자기가 좋아하던 짝을 따라 그토록 정다웠던 둥지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틀기 위해 우리 가족들 곁에서 날아갔다. 그것도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멀리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이다. 그때쯤 부터인가, 나는 무심결에도 하늘을 올려다 보는 못된 습성이 생겼다. 김포쪽 하늘에는 웬 비행기가 그토록 쉴새도 없이 뜨고 또 내리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다. 윤미가 없는 '윤미네 집'... 지금까지는 모두들 우리집을 윤미네 집이라고 불렀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이들 사진 찍는 일도 마무리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고, 26년동안 찍어 둔 필름뭉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지고 메말라 간다고들 하지만, 혈육을 같이한 사이에서만은 아직도 인간본래의 감성이 짙게 남아있었다. 우리는 딸 하나 아들 둘을 키워 오면서 어느 누구네 집이나 다를 것 없이 ‘윤미네 집’ 을 이루었다. 그저 낳은 이후로 안고 업고, 딩굴고 비비대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간지르고 꼬집고 깨물어 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를 나무우리(아기침대)에 넣어 두고 시간 맞춰 우유병을 물려주는 미국이나 구라파의 그런 식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 것을 너무나 한국적이라고 해야할 지 혹은 原始的이라는 비평꺼리가 될런지는 모를 일이나 나와 아내는 하여간에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만 키운 것이다. 앞으로의 젊은 세대들은 요즘같이 냉철하고 이성적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서양의 그네들처럼 그렇게 닮아 갈 것이란 미래예상은 어렵지 않지만, 그 방식이 나로서는 안타깝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자라던 그 때에는 내가 나의 공부방에 있다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온집안에 가득했다. 사람사는 집 같았다. 시간이 가고 날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월이 흘러갔다. 사진찍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나는 아마추어로서의 서툰 솜씨와 사진이란 표현매체로서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런대로 그들의 분위기라도 '기록'하여 훗날 한권의 사진집을 만들어 ‘윤미네 집'의 작은 전기로 남기고 싶었다. 눈도 뜨지 않은 갓난아이, 젖을 맛있게 빠는 모습, 할아버지댁 나들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 조그만 마당에서 노는 모습, 제 엄마와 형제들과 딩구는 때, 집근처 야산에서 들꽃이며 풀 사이를 헤집고 잠자리 나비를 쫓는 모습,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 가이 함께 자전거 하이킹을 다닐 때, 아이들의 심통부리는 얼굴, 방학 때면 집과 가까운 북한산에 오르고 가족캠핑이니 썰매를 탈 때, 대학 합격발표가 있던 날, 윤미의 혼인날을 받아두고... 그 모든 장면들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었다. 아이들의 일상생활은 보기에 따라서는 비슷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롭고 독특하여 아무리 섬세한 예술가일지라도 연출로는 불가능한 그런 자체표현을 수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손에 든 내가 이래라, 저래라 라고 지시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집에만 들어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어쩌다 귀가시간이 늦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 있을 때라도 한참 들여다 보면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카메라를 또 들이대고, 아이 깨운다고 아내에게 야단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이 한발 한발 걷기 시작할 때, 더듬더듬 말을 하는 등의 변화가 보이면 공연히 나혼자 흥분하여 필름소비만 더 축내곤 했으니 말이다. 사진은 어디가지나 시각적으로만 표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모습까지 담으려고 애썼으니 필름 낭비도 낭비지만 얼마나 나는 어리석기까지 했던지.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토록 천진했던 분위기도 차츰 차츰 사라지고 현실적으로 변해 寫眞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필름 소비량도 자연 줄어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란했던 것은 아이들이 카메라를 자꾸 의식하는 점과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우연히도 윤미의 일기를 들춰본 후부터 나는 자제해야 했다. 그 어느날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오늘은 선생님이 등수를 얘기하셨다. 그런데 나는 삼등이었다. 그때 사회만 안 틀렸으면 이등을 했을 걸,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이등이 윤희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윤희준이가 싫었다." 결혼한 나는 8평짜리 마포아파트에 우리 가정을 꾸몄다. 그곳에서 윤미를 낳았고 키웠으며, 암실만들 공간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화장실에서 현상하며 프린트도 했다. 그 후 숭인동의 조그마한 단독주택을 거쳐 갈현동 단독주택에서 꽤 오래 살면서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재작년에 남현동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다니는 학교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려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갈현동을 떠난 것이다.

 

이제 필름들을 꺼내 보니 보관이 서툴러 20년이 지난 것들 중에는 곰팡이가 끼어 있었으며, 당시 암실도 없이 현상하던 때라 그러했는지 필름에 스크러치와 먼지가 많이 끼어 있어 작화가 거의 불가능한 것도 많았다. 카메라는 낡은 '라이카'도 있었으나 불편해서 못썼고, 초기에는 '아사히펜탁스'를, 그 후 언제부터인가 '캐논 F-1'을 사용했다. 교환렌즈로는 초점거리가 24mm부터 까지를 써 왔는데, 사용빈도가 가장 많았던 것은 역시 35mm 광각렌즈였다. 사용필름은 초기에서는 실내에서는 Tri-X, 야외에서는 Pluss-X를 가려서 쓰다가 슬그머니 Tri-X 일변도로 쓰고 말았다. 현상은 주로 D-76으로 표준처리를 하였다. 일단 찍은 필름은 반드시 콘택트쉬트(8x10)로 인화하여 필름과 같이 연도마다 파일에 정리하여 후에는 필름찾기에 편하도록 배려를 해 두었다. 그리고 나의 게으름 탓인지 아무추어의 좋지 않은 습관 탓인지 '후래시'나 '트라이포드'를 사용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가정, 가족은 소중하고도 특별나며 남다르게 느께겠지만, 우리 부부가 이룩한 '윤미네 집', 윤미, 윤호, 윤석의 세 아이들과 함께 하나하나 이루어 온 '윤미네 집'은 자랑할 아무 것도 없는 내게는 언제나 큰 기쁨이었다. 더구나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도 아내는 헌신적으로 바르고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웠고, 사진재료만은 언제나 풍성하게 사주었다. '윤미네 집'구성원은 모두가 아름답고 자랑스럽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욱 더 샘솟는 애정을 보내며, 또한 이 사진집의 편집을 맡아준 朱明德(주명덕) 형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대신한다.

 

冠岳山(관악산)기슭 鹿鳴齊(녹명재)에서

全夢角(전몽각)